교육칼럼(FM통신)
내용
FM통신 11호
제목 : 아이의 성공 뒤에는 부모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지난주는 영재원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알찬 휴가 보내셨는지요? 이제는 휴가기분을 접고 슬슬 새 학기를 준비할 때입니다. 이번 주 통신은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의미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작할까합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의 황영조는 지금의 김연아나 박태환만큼 인기가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때 언론에는 지금의 김연아 박태환만큼 황영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렸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그 때 한 언론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황영조는 1991년 3월 동아마라톤 때 데뷔했습니다. 그 대회 때 그의 신분은 페이스메이커였습니다. 페이스메이커란 경기가 시작되면 남들보다 빨리 뛰어서 다른 선수들의 페이스를 흔들어 놓는 역할을 하는 선수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팀 선배선수들을 위해 희생하는 역할이지요. 당시 황영조의 소속팀 코오롱에는 이창우와 김완기라는 간판선수가 있었고, 황영조는 맨 선두에서 달리면서 다른 팀 선수들의 컨디션을 흐트러뜨리는 신참선수에 불과했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황영조는 감독의 명에 따라 처음부터 선두그룹을 치고 나갔습니다. 그러다 33km 지점을 통과할 즈음 갑자기 넘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페이스메이커에 불과한 황영조가 여기서 레이스를 포기해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페이스메이커로서 역할은 이미 훌륭하게 끝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러나 황영조는 벌떡 일어나 곧 선두그룹을 따라잡았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는 법. 35km 지점서 두 번째 넘어지더니 38km 지점서 다른 선수들과 발이 엉키면서 또 다시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제 선두그룹과의 차이는 800m로 벌어졌습니다. 황영조가 선두그룹을 따라 잡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잠실 종합운동장의 골인지점을 300여m 앞두고 황영조는 경이적인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놀랄만한 스피드로 선두 이창우 김재룡을 거의 따라 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스퍼트서 1, 2위 이창우 김재룡과 그야말로 박빙의 레이스를 펼쳤습니다. 결과는 1위에게 불과 1초 뒤진 2시간12분34초의 기록으로 3위. 황영조의 데뷔무대는 정말 경탄할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의 상승세를 몰아 그해 6월 하계유니버시아드 우승에 이어 1992년 일본 벳부마라톤서 2시간 8분대의 한국기록(당시로선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올림픽 우승의 꿈을 부풀렸습니다. 마라톤 풀코스도전 4번째 만에 올림픽 우승을 차지한 것은 세계 마라톤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는 올림픽 우승 후에 알려졌습니다. 한 기자가 황영조에게 1991년 3월 동아마라톤 때의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당시 3번이나 넘어져 도저히 선두를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레이스를 펼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황영조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세 번째 넘어졌을 때 나는 레이스를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페이스메이커로서 내 임무를 마쳤으므로 중간에 그만둔다고 해서 내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순간 문득 누나 생각이 났습니다. 당시 국내 마라톤 대회는 순수 아마추어 대회여서 입상자에게 상금 대신 상품을 주었습니다. 1등 오디오세트, 2등 냉장고, 3등 세탁기가 그 대회 상품이었습니다. 마침 그 대회가 열리기 몇 개월 전 누나가 결혼을 했는데 신혼집에 세탁기가 없었어요. 추운 겨울에 손빨래 하는 누나의 모습이 늘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3등을 하면 세탁기를 선물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죽을힘을 다해 뛰었던 거죠. 결과론적이지만 다행히 나는 3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1등을 한 것보다 더 기뻤습니다. 이제 누나는 그 세탁기로 인해 손빨래를 안 해도 된다는 생각 때문이죠. 지금도 그 세탁기는 누나 집에서 잘 돌아가고 있겠죠?”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황영조가 당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올림픽 마라톤서 금메달을 따낸 원동력은 바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 황영조가 자신의 마라톤 데뷔무대서 3번째 넘어진 뒤 레이스를 포기했다면 아마 황영조의 올림픽 우승은 없었을 것이다. 늘 가족을 생각하고,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 해주려는 그 마음, 그 사랑이 황영조의 올림픽 우승을 만든 것이다.’
그렇습니다. 가족의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가족의 사랑은 때때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듭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형제, 자매들의 따뜻한 우애는 우리 가족, 나아가 자신을 존재케 하는 힘입니다. 아이들은 가족의 사랑 속에서 자랍니다. 그리고 가족의 사랑을 깨달은 아이는 언젠가 가족에게 성공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지금 아이들 키우느라 힘드시죠? 그렇지만 한번 훗날 우리 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 저의 성공은 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힘이 절로 나지 않으십니까?
제목 : 아이의 성공 뒤에는 부모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지난주는 영재원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알찬 휴가 보내셨는지요? 이제는 휴가기분을 접고 슬슬 새 학기를 준비할 때입니다. 이번 주 통신은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의미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작할까합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의 황영조는 지금의 김연아나 박태환만큼 인기가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때 언론에는 지금의 김연아 박태환만큼 황영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렸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그 때 한 언론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황영조는 1991년 3월 동아마라톤 때 데뷔했습니다. 그 대회 때 그의 신분은 페이스메이커였습니다. 페이스메이커란 경기가 시작되면 남들보다 빨리 뛰어서 다른 선수들의 페이스를 흔들어 놓는 역할을 하는 선수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팀 선배선수들을 위해 희생하는 역할이지요. 당시 황영조의 소속팀 코오롱에는 이창우와 김완기라는 간판선수가 있었고, 황영조는 맨 선두에서 달리면서 다른 팀 선수들의 컨디션을 흐트러뜨리는 신참선수에 불과했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황영조는 감독의 명에 따라 처음부터 선두그룹을 치고 나갔습니다. 그러다 33km 지점을 통과할 즈음 갑자기 넘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페이스메이커에 불과한 황영조가 여기서 레이스를 포기해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페이스메이커로서 역할은 이미 훌륭하게 끝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러나 황영조는 벌떡 일어나 곧 선두그룹을 따라잡았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는 법. 35km 지점서 두 번째 넘어지더니 38km 지점서 다른 선수들과 발이 엉키면서 또 다시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제 선두그룹과의 차이는 800m로 벌어졌습니다. 황영조가 선두그룹을 따라 잡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잠실 종합운동장의 골인지점을 300여m 앞두고 황영조는 경이적인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놀랄만한 스피드로 선두 이창우 김재룡을 거의 따라 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스퍼트서 1, 2위 이창우 김재룡과 그야말로 박빙의 레이스를 펼쳤습니다. 결과는 1위에게 불과 1초 뒤진 2시간12분34초의 기록으로 3위. 황영조의 데뷔무대는 정말 경탄할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의 상승세를 몰아 그해 6월 하계유니버시아드 우승에 이어 1992년 일본 벳부마라톤서 2시간 8분대의 한국기록(당시로선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올림픽 우승의 꿈을 부풀렸습니다. 마라톤 풀코스도전 4번째 만에 올림픽 우승을 차지한 것은 세계 마라톤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는 올림픽 우승 후에 알려졌습니다. 한 기자가 황영조에게 1991년 3월 동아마라톤 때의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당시 3번이나 넘어져 도저히 선두를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레이스를 펼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황영조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세 번째 넘어졌을 때 나는 레이스를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페이스메이커로서 내 임무를 마쳤으므로 중간에 그만둔다고 해서 내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순간 문득 누나 생각이 났습니다. 당시 국내 마라톤 대회는 순수 아마추어 대회여서 입상자에게 상금 대신 상품을 주었습니다. 1등 오디오세트, 2등 냉장고, 3등 세탁기가 그 대회 상품이었습니다. 마침 그 대회가 열리기 몇 개월 전 누나가 결혼을 했는데 신혼집에 세탁기가 없었어요. 추운 겨울에 손빨래 하는 누나의 모습이 늘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3등을 하면 세탁기를 선물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죽을힘을 다해 뛰었던 거죠. 결과론적이지만 다행히 나는 3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1등을 한 것보다 더 기뻤습니다. 이제 누나는 그 세탁기로 인해 손빨래를 안 해도 된다는 생각 때문이죠. 지금도 그 세탁기는 누나 집에서 잘 돌아가고 있겠죠?”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황영조가 당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올림픽 마라톤서 금메달을 따낸 원동력은 바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 황영조가 자신의 마라톤 데뷔무대서 3번째 넘어진 뒤 레이스를 포기했다면 아마 황영조의 올림픽 우승은 없었을 것이다. 늘 가족을 생각하고,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 해주려는 그 마음, 그 사랑이 황영조의 올림픽 우승을 만든 것이다.’
그렇습니다. 가족의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가족의 사랑은 때때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듭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형제, 자매들의 따뜻한 우애는 우리 가족, 나아가 자신을 존재케 하는 힘입니다. 아이들은 가족의 사랑 속에서 자랍니다. 그리고 가족의 사랑을 깨달은 아이는 언젠가 가족에게 성공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지금 아이들 키우느라 힘드시죠? 그렇지만 한번 훗날 우리 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 저의 성공은 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힘이 절로 나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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